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나라, 몰타!

레몬빛으로 반짝이는 중세 도시 몰타. 작은 섬나라가 숨기고 있는 비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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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성상과 성당을 찾아볼 수 있다. 몰타 서쪽 해안의 제부치 마을 광장.

구글 어스로 세상의 정수리를 남김없이 엿볼 수 있는 시대지만, 그래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엔 언제나 세계지도를 한번 펼쳐 보곤 한다. 몰타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그랬다. 한 장으로 축소된 세계 위에서, 서울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작은 섬을 발견하 기란 쉽지 않았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거인 같은 세 개의 대륙 사이에 거대한 호수처럼 갇힌 바다, 지중해. 다음 날 내 가 다다를 낯선 땅은 지중해의 푸른 타원 위 하나의 점으로 떠 있었다. ‘몰타’라는 두 활자에 가려 섬의 해안선 이 잘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돌이켜보면, 여행에 대한 나의 기대 또한 소박했다.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바캉스의 목적지로 유명하 니 푹 쉬기엔 좋으리라. 해산물이나 실컷 먹다가 와야지. 기대가 적중하긴 했다. 몰타는 영국 의학 잡지<랜 싯>이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나라’로 선정했을 만큼 느긋한 나라였고, 어느 식당에 들어서든 참치와 농어, 신선하고 달콤한 새우 요리를 주 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섬에 얼마나 풍요로운 문화적 유산들이 퇴적되어 있는지 알게 된 것은 지도를접고 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로마까지 12시간, 거기에서 다시 몰타의 루카 국제공항까지 약 1시간. 내 발길을 맞은 것은 휴양지의 보편적 풍경이 아니라 레몬빛으로 반짝이는 중세 도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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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수도 발레타의 옛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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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식 동굴 블루 그로토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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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인근의 항구 스리 시티즈. 고급 요트가 가득 정박해 있다.

옛 전설이 숨쉬는 나라

몰타의 수도이자 지중해의 오래된 보석 발레타(Valetta)에 들어서고 나 서야 이곳에서 과거는 먼지 쌓인 채 역사서 속에 박제된 사건들에 그치 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 해자를 두른 요새와 성배를 둘러싼 모험 등 중세 유럽의 ‘로망스’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선명 하게 숨쉰다. 16세기 초 이 외딴섬에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 종전 후의 방랑 기사들이었다. 몰타의 문화 깊숙이 뿌리내린 가톨릭 전 통에 대한 이야기 역시 그 지점으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을 떠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섬에 상륙 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매년 몰타에서 잡은 매 두 마리를 스페인 국왕에 게 바친다는 조건으로 섬을 임대받았다. 터키의 오스만 튀르크와 면해 있던 몰타는 이교도들을 벌한다는 명목으로 터키의 갤리선으로부터 향 신료와 보물을 탈취해 유럽으로 수출했다. 범선이 바다 위를 누비고 대 항해 시대가 시작되며, 몰타의 지정학적 위치는 더없이 중요해졌다. 몰 타는 역설적이게도, 유럽과 중동 사이의 작은 격전지인 동시에 소통의 창 구였다. 지금 이곳에서 여행자의 마음을 끄는 많은 매력이 그 아이러니 로부터 출발했다. 몰타 사람들이 쓰는 말은 아랍어의 어감과 비슷했지 만, 정작 문자로 표기할 때는 로마자를 사용했다. 나는 끼니마다 신선한 치즈, 다채로운 파스타와 토끼 요리 등을 맛보았는데, 그 메뉴들은 영락 없이 남부 이탈리아의 음식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만찬이 끝난 식탁에 놓이는 건 짙고 혼탁한 터키식 가루 커피였다. 작은 시골 마을 광장을 들 를 때도 장엄한 바로크식 성당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건물마다 돌출된 색색의 테라스들은 아랍의 후궁 궁전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성상들 로 가득한 도시 안에서 몰타의 문화는 이교도에 대한 매혹을 품은 채 혼 란스럽게 번성해왔다.

프랑스 혁명 직후 나폴레옹이 이끄는 공 화국 군대가 몰타를 점령했다.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64년 마침내 하나의 국가로 독립했다. 하지만 어쩐지 근대의 시간은 몰타의 도시들에 어떤 흔 적도 남기지 않은 것만 같다. 빨간색 공중 전화 부스와 몇몇 영국식 펍만 눈에 띌 뿐, 몰타는 바로크의 경이로운 유산들과 지중 해의 눈부신 섬광들로만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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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바위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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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 임디나에 위치한 카르멜의 성모 성당.

레몬빛 도시들

발레타는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 화 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도시다. 난공 불락의 요새로 설계된 발레타는 높고 견 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를 따 라 둥글게 파인 해자를 건너 관문으로 들 어서면, 희미한 레몬빛으로 반짝이는 고풍스러운 석회암 건물들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성 요한 기사단이 이 요새 도시를 세우기까지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긴 시간이라 느낄 수도 있겠 지만, 시가지 곳곳의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들을 구경하다 보면 3 0년 만 에 이 정도의 스펙터클을 이룩해낸 저력에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발레 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성 요한 성당(St John’s Co-Cathedral) 이다. 외관은 다소 단조롭지만,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시야를 압도하는 웅장함에 말문이 막힌다. 아라곤부터 이탈리아까지 기사들의 출신 지역 에 따라 분배된 예배실, 아름답게 도금한 벽과 갖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완성한 바닥 등 성당 전체가 중세 예술사의 증거나 마찬가지다. 성 요한 성당에는 바로크 미술의 대가 카라바지오의 대작 두 점이 남아 있어, 예 술 애호가들의 순례가 연중 내내 이어지기도 한다. 공관과 성당을 제외 하면, 16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이제 레스토랑과 상점으로 빼곡하다. 건물마다 내놓은 야외석에서 몰타 전통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 며 골목골목을 느릿하게 걷는 시간은 꽤 즐겁다. 도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다 보면, 저 멀리 골목 끝으로부터 푸른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 시의 가장자리이자 지중해의 보석 발레타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항 구는 가까이에서 봐도 아름답지만, 최고의 전망대는 기사단의 휴식처였 던 바라카 가든(Barracca Gardens)에 있다. 바라카 가든의 테라스에서 바다를 굽어보면 저 옛날의 이슬람 군사들 대신 고급스러운 요트들이 발 레타 앞바다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몰타의 과거를 목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도시가 임디나다. 발레타에서 서쪽으로 15km, 거대한 바위 등성이에 놓인 임디나는 3000년 전 세워졌 다. 한때 임디나는 몰타의 정치적 중심지기도 했다. 아랍 양식의 골목들 과 바로크 양식의 거리들이 도시를 양분한다. 예전에는 고귀한 도시(Cita Notabile)라고도 불렸는데, 현재까지도 이곳에 살고 있는 몰타의 상류층 가문들로부터 유래한 별명이다. 11세기 지어진 시쿨라 노르만 대성당과 아랍 통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옛길의 공기는 또 다르다. 투박한 중동식 건물들이 골목을 호위한다. 가끔씩 고양이의 그림자만 얼씬거리는 한적한 소로 위로 오직 햇빛만이 포근하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레몬빛 뒷골목을 무작정 걸어보는 시간은 그야말로 여행자만의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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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젖으로 만든 고조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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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어로 ‘우리를 수호하는 성인 베르길리우스’를 뜻하는 몰타어 문장. 몰타의 가톨릭 인구는 전 국민의 96%에 달한다.

지중해의 푸른빛

지중해의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면 바다로 향할 것. 임디나에서 북쪽으로 20여분, 해안에 위치한 생 줄리앙(Saint Julien)과 슬레이마(Sleima)는 나라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젊은 도시다. 여름에는 세계적인 디제이들을 초대하는 음악 페스티벌과 열광적인 파티가 한 철 내내 열리며, 번화가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바위 해변에는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녹슨 난간에서 짙푸른 지중해로 뛰어드는 인파 때문에 수영복 한 벌 챙기지 않은 여행자의 마음조차 그저 들뜬다. 생 줄리앙은 다양한 특급 호텔과 고급 리조트들의 집결지라, 여행의 거점으로 삼기에도 좋다.

몰타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처케와(Cirkewwa) 항구에서 출발하는 고조 섬(Gozo Island)행 페리에 오르는 순간, 여행의 시침은 조금 더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다른 도시들이 위치한 몰타 본섬에 비해, 고조 섬은 좀 더 작고 한가로운 지역이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드웨라(Dwejra) 해안의 절경 애저 윈도(Azure Window)였다. 아치형 바위틈으로 지중해의 푸른 파도가 보이는 풍경이 마치 창문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안타깝게도 자연이 빚은 이 비경은 오랜 풍화 작용으로 몇 해 전 무너져 내렸다. ‘담청색 창문’은 사라졌지만, 드웨이라의 압도적 풍광은 변함없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1시즌의 피날레가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2800년 전 호메로스는 서사시 <오딧세이아>에 고조 섬을 등장시켰다. 오딧세우스가 님프 칼립소와 함께 7년을 머무른 동굴이 고조 섬 북쪽에 있다.

수영도 트레킹도 체력이 제법 소모되는 활동이다. 다행히 고조 섬은 맛있고 신선한 음식들로 이름 높은 지역이다. 특산물 고조 치즈는 몰타의 어느 식당에서나 주문할 수 있지만, 그날 아침 짠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고조 섬에만 있다. 푸딩처럼 부드럽고 담백한 치즈 위에 와인으로 맛을 낸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조금 뿌린다. 통째로 구운 농어의 살점이 입안에서 흩어지는 사이, 몰타산 샤도네이를 와인 글라스에 재차 따른다. 지중해의 풍미가 입안에서 풍요롭게 춤춘다. 신나지만 노곤한 여정 가운데 우연히 맛보는 만찬이야말로 여행자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 식탁이 고조 섬에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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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항구의 오래된 창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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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 발레타에서 열리는 수호 성인 축제 퍼레이드.

사라 팰리스 릴레 &샤토
임디나의 럭셔리 부티크 호텔. 17세기 몰타의 귀족이었던 패리지오 가문의 고택을 호텔로 개조했으며, 17개의 스위트는 모두 다르게 디자인되어 있다. 찰스 황태자를 비롯한 영국 황실 일원들이 몰타를 방문할 때 반드시 선택하는 호텔이기도 하다. www.xarapalace.com.mt

웨스틴 드래고나라 리조트
화려한 중세 도시보다 지중해에서의 휴양에 더 관심 있다면 웨스틴 드래고나라 리조트 몰타가 최선의 선택이다. 생 줄리앙의 떠들썩한 전경과 코발트빛 바다가 내다보이는 객실이 매력적이고, 여름 내내 유럽 전역에서 청춘들이 몰려드는 클럽들이 바로 근처에 있다. www.westinmalta.com

타 빅터 레스토랑
어부들의 마을 마르사실로크의 해산물 레스토랑. 몰타식 소시지로 풍성하게 구성한 전채를 먹은 후, 통째로 구워 기름지고 부드러운 농어에 올리브 오일과 레몬을 뿌린 후 몰타산 소비뇽 블랑과 함께 천천히 맛볼 것. www.tavictorrestaurant.com

타 네누 아티전 베이커리
타 네누 아티전 베이커는 발레타에서 가장 유명한 몰타 전통 식당이다. 주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화덕에서는 전통 빵과 몰타식 피자 프티라를 구워내고, 중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채로운 소스 또한 흥미롭다. 몰타 와인과 리큐어를 맛볼 수 있는 바에서 식전주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www.nenuthebaker.com

    에디터
    정미환(프리랜스 에디터)
    포토그래퍼
    Mihwan Jung, Kyuyeul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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